아아, 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물 위에, 스러져 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4월이라 파일날, 큰 길을 물밀어 가는 사람 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시뻘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城門) 위에서 내려다보니, 물 냄새, 모래 냄새,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이 그래도 무엇이 부족하여 제 몸까지 물고 뜯을 때, 혼자서 어두운 가슴 품은 젊은 사람은, 과거의 퍼런 꿈을 강물 위에 내어 던지나, 무정한 물결이 그 그림자를 멈출 리가 있으랴? ―― 아아, 꺾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없건마는, 가신 임 생각에 살아도 죽은 이 마음이야.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워 버릴까, 이 설움 살라 버릴까 어제도 아픈 발 끌면서 무덤에 가 보았더니, 겨울에는 말랐던 꽃이 어느덧 피었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다시 안 돌아오는가? 차라리 속 시원히 오늘밤 이 물 속에……. 그러면 행여나 불쌍히 여겨 줄 이나 있을까……. 할 적에 ‘퉁, 탕’ 불티를 날리면서 튀어나는 매화포, 펄떡 정신을 차리니, 우구구 떠드는 구경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꾸짖는 듯, 아아, 좀더 강렬한 정열에 살고 싶다. 저기 저 횃불처럼 엉기는 연기, 숨막히는 불꽃의 고통 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을 살고 싶다고 뜻밖에 가슴 두근거리는 것은 나의 마음……
4월달 따스한 바람이 강(江)을 넘으면, 청류벽(淸流壁), 모란봉(牡丹峰) 높은 언덕 위에, 허어옇게 흐늑이는 사람 떼, 바람이 와서 불 적마다 불빛에 물든 물결이 미친 웃음을 웃으니, 겁 많은 물고기는 모래 밑에 들어박히고, 물결치는 뱃슭에는 졸음 오는 ‘니즘’의 형상(形像)이 오락가락――어른거리는 그림자, 일어나는 웃음소리, 달아 논 등불 밑에서 목청껏 길게 빼는 어린 기생의 노래, 뜻밖에 정욕을 이끄는 불 구경도 인제는 겹고, 한 잔 한 잔 또 한 잔 끝없는 술도 인제는 싫어, 지저분한 배 밑창에 맥없이 누으면, 까닭 모르는 눈물은 눈을 데우며, 간단(間斷)없는 장고 소리에 겨운 남자들은, 때때로 불 이는 욕심에 못 견디어 번득이는 눈으로 뱃가에 뛰어나가면, 뒤에 남은 죽어가는 촛불은 우그러진 치마깃 위에 조을 때, 뜻있는 듯이 찌걱거리는 배젓개 소리는 더욱 가슴을 누른다…….
아아, 강물이 웃는다, 웃는다. 괴상한 웃음이다, 차디찬 강물이 껌껌한 하늘을 보고 웃는 웃음이다. 아아, 배가 올라온다. 배가 오른다. 바람이 불 적마다 슬프게 슬프게 삐걱거리는 배가 오른다…….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陵羅島)까지, 물살 빠른 대동강을 저어 오르라. 거기 너의 애인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곧추 너의 뱃머리를 돌리라. 물결 끝에서 일어나는 추운 바람도 무엇이리요. 괴이한 웃음소리도 무엇이리요. 사랑 잃은 청년의 어두운 가슴 속도 너에게야 무엇이리요.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있을 수 없는 것을……. 오오, 다만 네 확실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 오오, 사르라, 사르라! 오늘밤! 너의 발간 횃불을, 빨간 입술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빨간 눈물을…….
물밀어 가는 : 연달아 몰려 드는
흥성(興盛)스러운 : 매우 번성하여 흥겨운
매화포(梅花砲) : 종이를 써서 만든 딱총, 불꽃놀이의 도구
모란봉(牡丹峰) : 평양 근처 대동강가의 산
니즘 : 리듬, 잊음, 이즘(-ism) 등의 해석이 있으나 ‘리듬’으로 통용되어 왔다. ‘잊음’의 평안도 사투리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물결의 흠들림 속에 살아나는 망각의 형상’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간단(間斷) : 잠시 그침
능라도(陵羅島) : 대동강 가운데에 있는 섬
곧추 : 곧 바로
괴이(怪異)한 : 괴상하고 이상한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 날마다 밤이면 살구꽃이 화려하게 핀 나무 그늘에 와서 혼자 운다는 뜻. 여기서의 슬픔은 임을 여읜 슬픔일 수도 있고, 조국을 잃은 슬픔일 수도 있다.
4월이라 파일날, 큰 길을 물밀어 가는 사람 소리 :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하기 위해 큰 길로 나가서 연등놀이를 하는 사람들의 웅성거림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시뻘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 초파일날 불놀이하는 모습. 여기서 ‘불’은 강렬한 생의 의욕을 뜻하며, 붉은 빛의 색채감과 율동감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 : 횃불이 하늘을 밝히는 것을 활유법으로 표현한 것. ‘밤하늘’은 어두운 현실을 의미하며, ‘깨문다’는 것은 모든 부정적인 현실에 대한 시적 자아의 저항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혼자서 어두운 가슴 품은 : (남들은 즐거움에 차 있는데) 홀로 어두운 마음을 지닌, 슬픔에 잠겨 있는 시적 자아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무정한 물결이 그 그림자를 멈출 리가 있으랴? : 덧없이 흘러가는 물결은 시간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어두운 과거가 그 물결 위에 어리어 있으며, 그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는 설의적 표현이다.
지은이 : 주요한(朱耀翰, 1900-1973) 시인. 언론인. 정치가. 초기에는 서구풍의 자유시와 산문시, 상징적인 경향의 시를 썼으나 후기에는 맑고 밝은 서정의 민요적인 작품을 발표했다.
갈래 : 자유시(산문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상징적. 낭만적. 감상적
어조 : 격정적
심상 : 대조적. 관능적. 비유적
구성 : ‘현재 - 과거 회상 - 현재’의 시간 구성
1연 4월 초파일의 상황 제시
2연 임을 상실한 자아의 고뇌와 자학
3연 불놀이가 끝나고 격정이 지난 후에 느끼는 자아의 허탈감(2연의 부연)
4연 무력감에 대한 자조(自嘲)(시적 자아의 나약함)
5연 생에 대한 새로운 욕구, 새로운 생명에의 의지
제재 : 사월 초파일의 불놀이
주제 : 상실한 자의 슬픔과 고뇌, 또는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
의의 : 우리 나라 최초의 자유시
출전 : <창조>창간호(1919)
시의 행을 구분하지 않고 외형적인 리듬의 제약도 두지 않은 채, 시상을 자유 분방하게 전개시켜 나아간 형태적인 자유로움을 이 시에서 발견할 수 있다. 불놀이의 황홀한 정경과 시인의 고조된 감흥이 함께 조화를 이루면서 반복과 영탄의 수사적 표현이 시적 정서의 표현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최초의 본격적인 자유시’로 일컬어져 왔다. 근간에 발견된 자료에 의해 평가를 더 이상 고집하기는 어렵지만 우리 근대시의 형성 과정에 중요한 초기의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형식을 보면 전체 5연으로 된 산문시이다. 산문 형식으로 된 리듬의 강렬한 연속은 절제되지 않은 시적 자아의 격렬한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방식으로 채택되었다. 외형적 형식에 의지하여 율격을 유지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진보적이다. 또 계몽의 목소리가 아닌 개인적 정서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도 앞 시대의 시가들과는 다르다.
이 시의 시적 자아는 4월 초파일에 대동강에서 벌어진 불놀이를 배를 타고 구경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흥청대는 불놀이와는 반대로 임을 잃고 절망에 빠져 있다.
자살하고 싶은 충동과 좀더 강렬한 정열에 살고 싶은 희망 사이에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올바른 방향을 확실하게 포착하지 못한 시적 자아의 심리적 격동이 불놀이 장면과 조응(調應)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 전체는 대립적 의미 구조로 되어 있다. 제 1연은 이 시의 서장(序章)으로 석양이 낙조를 떨구고 있는 시적 공간과 ‘밤’이라는 시간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시적 공간과 시간에 이어지는 흥성스러운 사람들과 눈물을 참을 수 없는 ‘나’와의 대립은 그 서글픈 정경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즉, 연등제의 ‘불놀이’와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과 슬퍼하는 ‘나’와의 대립을 바탕으로 ‘삶’과 ‘죽음’과의 관계를 형상화하고 있다.
제 2연에서는 ‘불이 춤춘다’의 반복을 통하여 불놀이의 흥겨운 장면이 제시된다. 시적 자아는 성문(城門) 위에서 펼쳐지는 횃불의 광란을 보고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한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조차도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물며 제 몸까지도 물어 뜯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날의 추억의 상실감과 ‘무정한 물결’에 의해 끝없이 동요하고 어지럽게 된다는 말이다. 지난날의 추억을 잊어버리려는 것에 대한 반문은 탄식과 자포자기로 표상되어 있다. 그러다가 매화포 소리에 놀라 고통 속에서도 더욱 뜨거운 삶을 살고 싶다는 의지를 발견하고 있다.
<참고> 시적 정조
주된 시적 정조는 감상적, 영탄적, 이러한 애상적 분위기는 국권 상실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기인한다. 일제 강점으로 시인들은 우울과 비탄 속으로 빠지게 되고 불안과 퇴폐를 노래했다.
<참고> 문체와 심상
문체 : 변화 있는 동적인 문장과 참신한 문체. 직설적인 감상조의 문체. ‘신파조의 과장된 어조’라 비판하기도 함
심상 : 관념적 심상의 대립적 구조[삶-죽음, 밝음-어둠, 기쁨-슬픔, 고뇌-비상(飛翔) 또는 초월 심상의 구조화(構造化)]
<참고> 표현상 특징
①절제되지 않은 격렬한 감정을 산문 형식으로 표현. ②계몽주의적 목적 의식 배제, 순수 예술성 추구. ③생경한 한문투 배제, 순수 우리말 사용. ④구태의연한 정형성 탈피, 자유로운 시형 추구. ⑤영탄, 반복, 상징법 사용
<참고> 주요한의 시사적(詩史的) 의의
주요한은 서구주의자로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상징주의 색채가 엿보이며, 후기에는 낭만주의 민중 시인의 영향을 받고 있다. 우리 근대 초기 자유시 형성에 큰 기여를 했으며, 민족 의식에 바탕을 두고 언어의 순수성을 살리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어두웠던 1920년대 초반에 밝고 건강한 시 세계를 보여 주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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