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청주(淸州), 호 만해(萬海·卍海), 속명 유천(裕天), 자 정옥(貞玉), 계명 봉완(奉玩)이다.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출생하였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건양 1)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 그 뒤 1905년(광무 9)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1908년(융희 2)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명을 시찰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 서울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일을 맡았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城北洞)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自然)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는 상기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 등이 있다. 1973년 《한용운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1925년 만해는 사랑의 증도가 [님의 침묵]을 설악산에 오세암에서 탈고한다. 그가 시인으로서 우리 문학사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은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간행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서두에 그는 '독자여 나는 시인으로서 여러분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여러분이 나의 시를 읽을 때에 나는 슬퍼하고 스스로 슬퍼할 줄을 압니다'라고 밝히면서 그러나 '해 저문 벌판에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그리워서' 시를 쓸 수밖에 없다고 토로하고 있다.
[님의 침묵]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대승불교의 보살도와 선을 통한 자기 수양의 결과를 순화된 정서로 표현하고 있다. 외세의 질곡에서 박탈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생을, 님을 통한 사랑으로 어루만지면서 무집착 무분별 절대평등의 불이사상을 보여준는 것이다. 시 이외에 다수의 수필과 소설[죽음]을 비롯하여 [흑풍], [후회], [철혈미인], [박명]등 다섯편의 장편소설을 남기고 있다.
한용운은 어린 시절(인생이란 무엇인가. 밤낮 근근 살자하다 생명이 가면 무엇을 남기는가) 하여 삶의 본질에 대한 강한 회의를 품고 평범한 삶을 거부하고 불가에 입문하게 된다.
백담사에서 김연곡 스님을 만나 득도한 이래 철저한 자기 수련을 통해 구도자로서의 자리를 잡아갔다. 1910년 한일불교동맹조약 분쇄를 위해 동래 범어사에게 궐기대회를 열어 친일승 이해광을 종문난적으로 비판하고 이 동맹을 철회하게 하였다. 조선 불교 사찰령의 제정 반포와 함께 조선총독부의 전조선사찰관리가 시행되자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하여 조선 불교계의 제반 문제점을 지적 하며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한다.
1914년 [불교대전] (범어사간)을 간행한다. 이는 통도사 장경강의 장경을 열람하고 주제별로경전을 정리한 것으로 대장경 보편화 작업의 초석을 마련한 큰 업적으로 평가된다. 1924년에는 법보화를 조직하여 불교 대중화 운동에 앞장섰고, 불교 청년회를 조직, 이를 불교청연동맹으로 확대 개편하면서 불타정신의 체험, 합리중정의 확립 대중불교의 실현이라는 3대강령을 실천에 옮겼다. 이밖에도 불교지를 인수하여 많은 논설을 발표하는 등 종교인으로서의 만해는 민족 종교로서의 불교의 역할과 시대정신을 일깨웠던 것이다.
한용운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를 늘 고뇌하고 실천에 옮겨 행동하는 지사였다. 쓰러져가는 민족의 암울한 현실에 그는 분연히 일어서 적극 대항함으로써 정도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려 했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라, 고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고 평화가 없는 사람은 가장 고통스러운 자라> (조선독립에 대한감상의 개요중) 만해의 독립운동은 이러한 자유평등의 사상에서 출발한다.
조국이 강점된 이듬해인 1911년 만주로 망명해 이시영 등과 함께 독립군을 모으기도 했으며, 3.1운동 당시에는 33인의 민족 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육당이 쓴 독립선언서에 행동강령으로 공약삼장을 추가하였다. 거사 당일 만세 삼창을 선창하고 <이제 내 나라에서 죽으니 한이 없다>는 말을 남겼다.
일제의 황민화운동, 창씨개명운동, 조선인 학병출정 등을 끝까지 반대하여 투쟁하며 <청년아 만지풍설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매화의 정절을 본받으라>고 격려했다. 꺼져 가는 민족혼의 불씨를 지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유, 평화, 평화의 비폭력 정신으로 민족의 내일을 일깨운 선각자였다.
만해 한용운, 그를 어느 한 마디로 정의하기란 어렵다. 글은 지조와 대쪽같은 정절로 민족 정기를 지킨 독립운동가인가 하면 불교의 대강백, 대선사로서의 승려였고, 사랑의 증도가를 노래하던 대시인이다. 그러면서 그는 사상가였다. 만해는 어느 것 하나에 집착해 있지 않으면서 이미 그 세계를 뛰어 넘어 있다. 그것은 무변이요, 단과 상을 여윈 자리에 다시 우뚝 솟아 중정의 도를 가르치고 있다. 여기에 만해의 종교와 철학이 있다.
그 첫번째는 공사상이다. 현상과 본체의 관계를 직시하여 조건에 의한 실체의 파악일 뿐 실체는 없다는 정신이다.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님은 가지도 오지도 않은 불거불래의 존재다. 이러한 반야의 공사상은 진리의 현상을 직시하여 이 역사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를 설명한다.
두 번째는 법신사상이다. 법신이란 수많은 개별적 존재들이 불가분리한 유기적인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연기의 주체로 파악된다. 소설가, 독립운동가, 승려의 다양한 모습이 만해의 행동이며 철학이었다. 따라서 한용운의 님은 조국이요, 불타요, 연인이며, 그것 모두를 함축하기도 한 법신사상의 언어 형상화다.
세번째는 언행일치의 실천운동이다. 나보다는 너를 위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정신이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이라는 시에서 너와 나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님을 향한 대비원력의 정진력이 모든 대중을 살리는 자유, 평등, 평화를 보장한다는 만해정신의 뿌리다.
한용운이 즐겨 사용하는 님, 사랑, 이별, 만남, 기다림, 슬픔, 등불, 나룻배, 눈물 등의 시어는 우리 민족이 오래오래 사용해 온 가장 평범하고 쉬운 단어들이다. 이 시어들에는 민족의 정서와 가락이 한껏 묻어 있다. 만해의 시는 염무웅의 말처럼 '젊은이에게는 사랑의 노래로서, 민족주의자에게는 민족 해방의 염원을 주고받는 암호로서, 종교인에게는 구원의 언어로서 읽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해시의 중심개념인 '님'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표현되고 상징된다. '님'은 '비로자나불'의 모습을 띠기도 하고, 진실된 자아의 진면목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님'은 구제해야 할 중생, 건져야 할 조국이 되어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 '님'의 모습이 별개의 것은 아니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에는 차별이 없다'라고 한 <화엄경>의 말처럼 '님'이 부처의 모습을 갖건 자아의 모습으로 나타나건 다시 중생의 얼굴로 변하건 간에 그것은 셋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다. 또한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셋인 것이다. '님'이란 시어 속에는 고도의 상징이 깃들어 있고, 또 그것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님'의 모습이 <화엄경>에 등장하는 '비로자나불', 곧 우주 그 자체, 진리 그 자체로 상징될 때 만해는 그 세계를 향해 가는 참으로 진실한 구도자가 되기를 염원한다. 그러나 그가 만난 '님'이 '해 저문 벌판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의 모습으로 변할 때 그는 다시 '등불'이 되고 '나룻배'가 되어 하화중생(下化衆生)하는 보살 행자가 되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한용운에 대한 평가는 독립운동가로서든, 시인으로서든, 승려로서든 일반적으로 긍정적이었다. 부정적인 평가는 찾기가 어려웠다. 시인으로서 한용운에 평가는 상당히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한용운의 시를 전통과 관련시켜 마지막 전통시인으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인권환, 박노준은 만해의 한국시사상의 위치는 육당의 신체시로부터 주요한의 신시에의 교량적 역할을 담당한 데 그 중요성이 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송욱은 “신문학사상 가장 높고 넓으며, 깊은 인간성을 표현한 작품이며, [님의 침묵]이 이 세계에서 오직 한 권밖에 없는 [사랑의 증도가]이다.“라고 평했다.
백낙청은 사회사적 시각에서 한용운의 문학사적 위치를 “작품의 양으로나 질로나, 또는 그의 작품 발표가 <창조>보다 한 해 앞선 <유심>지에서 비롯한다는 시기적 순위로나 한용운은 한국 최초의 근대시인이요 3.1 운동이 낳은 최대의 시민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만해가 동시에 한국 마지막의 위대한 전통시인이었다는 사실은 그만이 누릴 명예이자, 전통의 계승을 바라는 우리들 모두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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